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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_괴테 지음

by 정보 크리에이터_정크 2020. 2. 9.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이탈리아를 1년 9개월간 여행하며 남긴 기록입니다. 1786년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칼스바트에서 로마까지,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나폴리아 시칠리아, 그해 6월부터 1788년 4월까지 두 번째 로마 체류기를 남겼습니다.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습니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독서광이였던 괴테였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습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 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됩니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라이프치히에서 법을 공부하던 중 만난 안나 카타리나 쇤코프에게 시를 지어 바치기 시작해 1770년 익명으로 『아네트』라는 시집을 발표합니다. 1771년 변호사로 개업하고 2년 뒤, 업무상 머물게 된 베츨라르에서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된다. 1774년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습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습니다.

 

1794년부터 독일문학의 또 다른 거장 실러와 우정을 쌓으며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1795-1796) 등의 걸작을 내어놓았습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위험을 감수하는 인간 유형을 만들어낸 극시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해 1부는 1808년에, 2부는 1832년 그가 죽은 후 출간되었습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습니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됩니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습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 『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됩니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 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합니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습니다.

 

오늘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대해 리뷰해 보았습니다. 더 많은 포스팅과 추천 포스팅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관련 글 및 추천 포스팅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공감, 구독 및 따뜻한 댓글은 많은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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